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1장 노련한 장애인

 우리가 장애나 질병, 또는 '핵토'라고 취급되는 내 신체의 외양과 기능이 주는 각종 한계와 멸시에 노련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고도로 성찰적인 자아를 가져야 한다. 이 자아는 타인의 시선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그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순간 그 의미를 분별하며, 그것이 자아의 본질로 공격해 들어올 때 진지를 구축한다('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본격적 분리). 성찰성을 발휘하면 '보여지는 나'가 앞장서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분노를 전개하는 변론자의 배역을 수행performing한다. 성찰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노련함의 근본 조건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이 성찰 능력을 잃지 않는 기술은 모욕과 수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배역의 수행 능력이 탁월해질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상처를 피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극(퍼포먼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비극과 희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세상이 원하는 배역은 성실히 수행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마치 삶을 게임처럼 대하는 태도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일종의 공연(퍼포먼스)이 된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탁월한 공연자performer가 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자아를 지키고 자신을 연출하는 데 골몰하는 고도의 노련함은 결국 삶 자체를 퍼포먼스로 만든다. 노련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연극적 수행으로 채우고, 타인의 행위도 연극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24시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위도 진심으로 믿지 못한다. ...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반성적(성찰적) 시선을 잃기 때문에 수치스러울 겨를이 없다. 이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한다. 오로지 하나의 감정, 한 명의 존재, 유일한 현실만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압도한다. ...
 상호작용에 '노련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부재하다. 이들은 언제나 자기를 관찰하고 통제하고 연기해왔기 때문에, 무릎 꿇은 부모들처럼 자신을 관찰하는 시야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 대상, 목표를 위해서만 의식이 정향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모들의 읍소와 자신들의 분노는 연극 무대 위의 퍼포먼스 대결일 뿐이다. ...
 SNS가 발달한 시대에는 평범한 개인의 퍼포먼스조차 무한한 관객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 대다수는 매사에 삶을 연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수많은 설정 사진, 점점 더 자극적인 1인 방송을 연출하는 유튜버들의 행위에서 그 충동의 그림자를 본다. 장애, 질병, 그 밖에 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기 쉬운 요소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퍼포먼스에 더욱 쉽게 동원된다. ...
---

2장 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

 사람들이 품격을 위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와 존엄을 위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를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가 실재(진실)를 공유한다. 그 공유하는 실재 위에서 서로가 서로의 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대등하게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
 반면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실재를 공유할 필요가 없고, 서로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필요하지도 않다. 품격 있는 권력자의 고매한 태도를 연출할 때, 의전을 수행하는 실무자는 그 무대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 장애인, 노숙인, 빈자들이 권력자의 도덕적 선량함을 빛내는 데 동원되지만, 그때에도 동원된 이들의 반응은 무대에 반영되지 않는다. ...
---

4장 잘못된 삶

 이런 이야기는 논리적 차원의 문제일 뿐 구체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 보이기도 하지만, 장애나 질병 등 '잘못되었다'고 규정된 몸의 속성이 결코 개인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의 존재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과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열등한' 혹은 '잘못된' 어떤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을 더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positive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무엇이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는 그와 같은 스타일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내가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휠체어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그것을 우리 몸에 맞게 조율하며 허세를 부릴 때, 우리는 분명 '정상성의 결여'로서 '나'를 인식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 나는 오직 '정상' 이 아닌 상태로 존재했다. 나의 외모와 정신의 스타일을 추구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했다.

... 질병과 장애에는 각각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질병과 장애를 안은 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기록된다. ... 만성적인 질병, 늘 약을 먹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때로는 빨리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질병이나 우발적인 사고로 갖게 된 '장애'라는 몸 상태는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야기narrative가 된다. 내 몸이 가진 이 속성, 흔적,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정체성이란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장애를 정체성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이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과 역사를 내 자아의 중대한 부분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

5장 기꺼운 책임

...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장애를 어떤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믿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장애아의 출산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산물이 손해라는 말인가.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

 정체성의 수용에 성공한다면, 그는 장애와 질병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살아갈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이란 걷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가 없다고 해서 자신이 부자유하고, 가치 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자기 몸과 정신이 부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은 버리지 않는다.
 키가 아주 작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

6장 법 앞에서

... 아픈 사람이 자신의 질병을 자기 서사의 중심에 놓는 경향이 있다면, 이는 질병을 나름의 방식으로 납득해야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납득하기 위해 그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신화) 또는 이론(기상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사회학 등)을 필요로 했다. 우리 개개인도 자기 인생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론을 만든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이야기'로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아마 가장 우아할 것이다. ...
... 그러나 법은 법에 걸린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하고 복지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개인들이 힘들게 구축해온 자기 서사와 나름의 이론을 종종 철저히 무시한다. 이런 '잘못된 삶'들은 법 앞에서 구체적인 서사를 가진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실격당한 삶이 된다.
---

7장 권리를 발명하다

 신체의 자유와 같은 자유권은 '하지 말라'라는 방어적인 권리로 이해되는 반면, 헌법 제34조로 대표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복지에 대한 권리)'는 국가에게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여하고 그 의무의 적극적인 이행을 요청하는 식의 '하라'라는 권리의 형식을 띤다. 국민의 기본적인 생계를 돕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노인, 청소년, 장애인 등의 삶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이런 헌법상의 권리를 헌법학자들은 자유권과 대비하여 사회권(사회권적 기본권)이라고 부른다.
... 이동권을 복지의 문제, 즉 사회권의 문제로 본다면 정부가 장애인복지관 건립에 재정을 지원하고, 특수 차량으로 장애인들의 나들이를 돕고, 각종 공공시설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도록 유도하는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고 있을 경우 침해당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사회권(복지)이 아니라 마치 자유권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이러한 자유권/사회권의 이분법적인 접근을 계속 유지했다. ...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를 다시 표현한다면, 이는 결국 "순응을 요구할 근거가 없다면 개인이 국가나 고용주[등]가 개인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당신은 혹시 나에게 장애가 없거나 장애가 없는 척하지 않으면 이 회사에, 학교에, 영화관에, 식당에, 정부 건물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당신이' 제공해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장애를 가진 내 모습 그대로를 존중받아야 한다. ...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
---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

 신체를 혐오하거나 피하고, 그에 무심하거나 편견을 갖고, 그것을 욕망하는 모든 일은 단순하고 1차원적인 반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근육병과 골형성부전증에 따라 붙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운명 '서사시'에 매혹되어 종교적 감수성을 느낀다고 한들 이는 그 존재에 대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부모가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정체성의 인정)은 때로 충돌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고통이나 역경을 회피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잘못된 삶'을 아예 살지 않거나 가능하면 그런 삶과 거리를 둔 채 안락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반면 온전하게 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된 삶'이라는 규정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는 더 '어려운' 길(역경)일 수 있다. 이른바 '난쟁이'로 불리는 연골무형성증을 가진 장애 아동의 삶을 떠올려보라. 그 아이가 자기 신체를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존중하며, 자기의 삶을 '잘못된 삶'이 아니라고 변론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차라리 자기 신체를 '잘못된' 것이라 인정한 뒤 많은 돈을 모으거나 높은 지위를 획득해 그 '잘못된 신체'를 보완하고 타인을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하는 쪽이 더 쉬울지 모른다. 우리는 현실에서 가난한 환경, 아름답지 않는 외모, 낮은 학력, 장애와 질병을 지닌 채로 일정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같은 처지에 놓인 타인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일을 종종 목격한다. ...

 그러나 정체성 정치에는 명백한 함정이 있다. 대표적인 함정은 오로지 그 정체성을 가진 집단만이 자신들의 존엄과 아름다움에 대해 발언하고, 법적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받는 방법을 말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장애인만이 장애인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장애인만이 장애인의 매력을 규정할 수 있다는 입장은 그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부모, 형제, 친구, 연인, 국가기관의 공무원과 직업 정치인을 포함한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장애에 관한 논쟁, 이를테면 '잘못된 삶' 소송을 둘러싼 공적 논쟁에서 배제한다. 법철학자 마사 미노우는 정체성 정치가 개개인의 상황을 지나치게 특정한 집단 정체성으로만 축약하며,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정체성과 상호 교차한다는 점을 무시하고,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구분선들이 현대 사회에 들어 해체되고 있다는 점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과거에는 장애였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게 될 수도 있고, 장애가 없는 사람도 노년이 되면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호 교차성과 비일관성을 정체성 정치는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피부 관리해야 돼"라는 귀엽고, 뭉클하고, 놀랍도록 탁월한 상호작용 기술을 발휘해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세상을 향한 긴 순환을 시작한다.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