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 움베르토 에코


 앞서 나는 며칠에 걸쳐서 한 소년의 분열된 자아를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소년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추구하는 메시지들에 노출되어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런던의 안개를 머릿속에 그리며 몽상에 잠겼다. 소년의 몽상 속에서는 팡토마스가 산도칸과 싸웠고, 그들 주위로 쇠못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으며, 영국인들은 셜록 홈스의 동포들답게 그 포탄 세례에 가슴에 구멍이 나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라디오는 도시 변두리의 평온한 삶만을 열망하는 소박한 회사원을 인생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노래는 예외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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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일요일, 축구광인 아빠가 나를 경기장에 데려가셨다. 내가 눈이 나빠지도록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조금 언짢으셨던 모양이다. 중요한 경기가 아니라서 관중석은 거의 비어 있다. 햇볕을 받아 뜨겁게 달구어진 하얀 의자들 여기저기에 얼마 되지 않는 관전자들이 얼룩덜룩한 반점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경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심판이 호루라기를 분다. 한쪽 팀 주장이 판정에 항의하는 동안, 다른 선수들은 공연히 경기장을 돌아다닌다. 어수선하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두 가지 색깔의 유니폼들, 심드렁하게 푸른 잔디밭을 배회하는 선수들, 무질서한 흩어짐. 모든 것이 돌연 활기를 잃고 시들해진다. 이제 눈앞의 광경이 느린 동작 화면처럼 펼쳐진다. 성당 부속 영화관에서 필름이 끊어질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갑자기 고양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영화의 소리가 끊기고, 동작들이 머뭇머뭇 이어지며 한 장면에서 머물다가, 결국엔 이 스틸 사진 같은 장면마저 녹은 밀랍처럼 스크린에서 가뭇없이 사라질 때처럼 말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나의 계시를 얻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계시라기보다 고통스러운 느낌이었다. 세계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 세계는 어떤 오해의 무기력한 산물이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내 느낌을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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